재미있는 소금이야기

우리나라의 소금이야기

어사 박문수와 소금
조선시대 현명한 관리의 상징인 어사 박문수는 1732년(영조) 흉년이 들자 백성들에게 소금을 생산하는 일자리를 만들어 그해의 흉년을 슬기롭게 넘기도록 하였습니다.

주몽과 소금산
한나라의 소금이동 통제로 부여의 소금이 부족해지자 주몽은 소금을 구하기 위해 현재의 인도 북부 티베트 소금산(암염)으로 먼 여행을 떠납니다. 대량의 소금을 얻어 돌아온 주몽은 부여의 소금 문제를 해결하여 백성의 신망을 얻어 훗날 고구려 건국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금장수 미천왕 을불
왕권다툼에서 밀려난 고구려 왕자 을불은 소금장수로 세상을 떠돌면서 추적을 피했습니다. 그 과정에 민심도 헤아리고, 더불어 경제적 기반도 다졌습니다. 후에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고구려 15대 미천왕입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이 내용은 우리나라 등짐장수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 대단히 중요한 사료입니다. 또한 생활필수품인 소금이 당시에는 국가 전매가 아니라 일반 상인들이 자유롭게 판매 할 수 있는 상품이었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임진왜란 때 큰 활약을 펼친 조선시대 명장 이순신
임진왜란 때 충무공이 정부에 군수물자의 자원을 요청했지만 충무공을 경계하는 무리들은 지원물자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충무공은 좌절하지 않고 관장하는 지역에서 모든 백성들이 활발하게 생산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특히 여수부근에서 소금이 많이 생산될 수 있도록 지원하였고 여기서 만들어진 소금을 군사와 백성들에게 공평하게 분배하였습니다. 사기가 크게 오른 백성들이 모두 자발적으로 나서서 군수물자 확보에 힘을 합하였으며, 이것이 충무공이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 힘이 되었습니다.

동의보감, 허준
허준의 「동의보감」에서는 소금은 "본성이 따뜻하고 맛이 짜며, 독이 없다. 귀사와 고사증, 독기를 다tm리고 증오와 심통, 곽란과 심복의 급통과 하부의 익창을 고치고 흉중의 담벽과 숙식을 토하고 오미를 돕는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소금은 식품으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약품으로서의 가치도 매우 높습니다.

소금이 왕을 만들다(광해군에 얽힌 소금이야기)
조선시대 선조가 세자 책봉에 대한 일을 생각하다가, 여러 왕자들을 앞에 불러 놓고 그들의 슬기를 시험해 본 일이 있습니다. "너희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묻자, 왕자들은 "떡"이라고도 하고, 혹은 "꿀이요","고기요"라고도 하는데 광해군의 차례가 되자, 그는 뜻밖에"소금이올시다."라고 하였습니다. 선조가 그 까닭을 물으니"모든 음식은 소금이 들어가야 맛이 나기 때문이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선조는 이에 크게 만족하여, 그의 형인 임해군과 그 밖의 여러 왕자들을 물리치고 그를 세자로 책봉하였습니다.

다른 나라의 소금이야기

이집트 사람들이 썼던 소금
이집트인들은 최초로 소금에 절인 식품을 대규모로 생산했습니다. 이집트인들은 나일강의 푸른 퇴적층에서 곡식을 재배했습니다. 그런데 가뭄이 드는 해에는 고물 생산량이 줄었기 때문에 소금에 절인 생선과 고기를 먹어야 했습니다. 이들은 나일강 너머의 사막에서 소금을 얻었습니다. 이곳의 마른 호수 바닥에 소금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쉽게 소금을 긁어낼 수 있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살아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을 위해서도 소금을 모두 두었습니다. 이집트 무덤에서는 보존 식품을 넣은 항아리가 발견되는데, 이는 죽은 사람이 지하 세계로 여행하는 데 도움이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의 몸은 깨끗이 씻은 다음 소금을 뿌려 영원히 보존하였습니다.

중국의 세금은 소금
고대 중국은 최초의 소금제국을 건설했습니다. 소금의 가치를 알았던 지배자는 정부만이 소금을 생산하고 팔 수 있게 했습니다. 따라서 정부가 돈이 필요할 경우에는 소급 값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당나라(618년~907년) 때에는 중국 정부가 벌어들인 돈의 절반이 소금에서 나왔습니다. 만리장성을 짓는 데 필요한 돈도 소금에서 나왔습니다. 중국 군대에 필요한 돈도 소금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비싸게 소금을 사는 것을 당연히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소금 값을 터무니없이 받았기 때문에 중국 역사 내내 지배자들은 인기가 없었습니다.

로마, 소금의 제국
수세기 동안 로마인들은 서방세계를 지배했습니다. 처음부터 소금은 그들이 가진 힘의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로마인들은 모두가 소금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공통의 소금'을 조개껍질에 담아 먹었고, 부잣집 잔치에는 소금이 화려한 은그릇에 담겨 나왔습니다. 중국의 황제들과 달리 로마의 지배자들은 소금을 자기 수중에 두려고 하기보다는 가격을 통제했습니다.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게 로마의 지배자들은 소금 가격을 낮추려고 노력했습니다. 가끔 군대에 필요한 돈을 모으기 위해 소금에 세금을 매기기도 했지만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전쟁을 앞두고 소금을 공짜로 나누어 주어 인심을 얻기도 했습니다. 지중해 전역에서 로마인들은 소금을 넣어 아주 가치가 높은 생산물을 만들었습니다. 생선소스, 자줏빛 조개염료, 소금에 절인 생산 등이 그것입니다. 로마인들은 여러 종류의 생선을 소금에 말린 다음 서방 세계 곳곳에 팔았습니다.

프랑스의 소금세금
중국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도 소금에 세금을 붙였습니다. 필립4세는 나라 일에 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세금을 내야만 소금을 사고 팔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한 앙리 4세 때는 나라에서 거둬들이는 세금 중 소금세금이 두 번째로 많았습니다.

인도에서의 소금
20세기 초까지도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였습니다. 따라서 인도 사람들은 소금을 살 때마다 영국에 세금을 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간디는 영국이 인도를 다스리는 게 옳지 않다고 생각해 인도의 독립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에 이 세금을 내지 않기로 마음먹고 적은 양지만 인도양에서 직접 소금을 만들게 되었습니다.